“172cm의 키로 국가대표 센터까지 전담수비했었죠”

게시판 스포츠 뉴스 “172cm의 키로 국가대표 센터까지 전담수비했었죠”

  • This topic is empty.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글쓴이
  • #38330
    adminadmin
    키 마스터

    [김종수의 농구人터뷰(32)] ‘더 포인트가드’ 박현숙

    농구대잔치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시절, 국민은행은 금융권팀의 자존심으로 불렸다. 현대, 삼성, 선경(SK) 등 대기업에서 만든 실업팀이 득세하면서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금융팀들은 하나둘 시들어가던 시기, 정면에서 경쟁하며 최고의 복병으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스카우트 등에서 불리한 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84년, 1989년, 1993년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90년과 1994년 우승은 삼성생명 왕조의 질주를 막아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80년대에는 당대의 센터 조문주가 팀내 간판스타로 활약했으며 이후 1990년대 초중반에는 박현숙, 이강희의 가드라인이 팀을 이끌었다. 둘다 신장은 크지 않은 편이었지만 탁월한 기술에 더해 특유의 농구 센스가 빛났으며 무엇보다 당시 국민은행의 상징인 투지와 근성이 굉장한 선수들이었다. 슈팅가드 이강희가 주포로서 득점의 중심에 섰다면 박현숙(53‧172cm)은 야전사령관으로서 팀을 진두지휘했다.

    당시는 각 포지션별로 디테일한 구분이 되지 않던 시기였다. 가드 둘, 포워드 둘, 센터 그런식으로 뭉뚱그려져 언급되기 일쑤였고 개인기술이나 전술도 지금처럼 풍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현숙은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매우 뛰어난 정통 포인트가드였다. 자신도 상당한 득점 기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넓은 시야와 센스 넘치는 패스를 통해 팀원 전체를 살려주는 퓨어가드로서 명성이 높았다.

    박현숙의 플레이는 화려하면서도 간결했다. 정상급 1번들이 그렇듯 박현숙은 드리블이 매우 좋았다. 당연히 볼 간수가 잘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능력을 살려 돌파도 곧잘 성공시켰다. 여기서부터 박현숙의 진가가 나온다. 기본적으로 패스가 좋은 선수가 돌파 옵션까지 가지고 있다보니 그로인해 파생되는 옵션이 정말 많았다.

    최소 한명 이상 수비수를 달고 다니면서도 동료의 위치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 창의적인 패스를 건네줬다. 그녀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수비수가 바짝 붙기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동선을 막아보기도 했지만 컴퓨터같이 정교한 패스는 거리나 위치를 가리지 않았다. 외곽에서 쉽게 골밑의 빅맨에서 패스를 넘겨줬으며 골밑으로 파고든 상태에서는 수비진의 움직임을 자신에게 쏠리게 한 뒤 킥아웃패스로 외곽 찬스를 만들어줬다.

    전매특허인 아이페이크로 혼선을 준 뒤 노룩패스를 주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돌파나 미들슛 등으로 득점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그야말로 언터처블이었다. 자주 쏘지는 않았지만 외곽슛에도 일가견이 있어 3점 라인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서 롱슛을 적중시켜 상대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그야말로 정통 포인트가드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어였다.

    코오롱 천은숙, 삼성생명 손경원, 현대산업개발 전주원, 한국화장품 윤영미 등 90년대 초반 에는 좋은 가드가 워낙 많았다. 때문에 이들이 모인 국가대표팀에서는 투가드는 기본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3가드, 4가드까지 돌아갈 때도 많았는데 그런 가운데 중심을 잡아주는 리딩가드 역할은 주로 박현숙이 맡았다. 가장 시야가 넓고 리딩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더 포인트가드’라는 명칭에 정말 잘맞는 선수였다.
     

    “아들 녀석이 농구장에서 도루 연습을 하고 있더라고요”

    Q.은퇴후 어떻게 지내셨어요?
    국민은행에서 선수로 은퇴하고 그해 겨울에 결혼하자마자 10여년 넘게 은행원으로 근무했어요. 큰 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 정도까지 쭉 일했던 것 같아요. 당시는 지금과 달리 주 6일 근무제였잖아요. 아이들 키우면서 은행원일까지 하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당시는 이른바 주판세대는 아니었지만 그랬다고 해도 큰 상관은 없었을 듯 싶어요. 제가 여상을 나왔거든요. 미리미리 은행원으로서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있던 상태인지라 선수 은퇴 이후에도 무던하게 잘 녹아들 수 있었어요. 제가 또 선수 시절부터 적응력은 또 워낙 좋았거든요(웃음). 어떤 선수들은 은행 업무가 적응이 안된다고 힘들어하고 심지어 펑펑 울기도했는데 저로서는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농구에 대한 생각은 거의 잊고지냈다가 어느날 절친 (이)강희가 ‘농구 한번 해보지않을래?’라고 묻더라고요. 뭔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어머니 농구’였어요. 은퇴한 예전 선수들이 각자 팀을 이뤄서 경기를 하는 것인데 오랜만에 농구공을 잡아봤음에도 참 즐겁고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WKBL 기록판정원으로 일하고 있고 WKBL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서 유소년 농구지도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Q.어느 정도는 하고 싶은 것, 다 하시면서 살아온거네요.
    비교적 그렇기는 했지만 어릴 때 꿈은 이루지 못했어요.(웃음) 어릴 때 제가 한문을 너무 좋아해서 장래희망이 한문 학자였어요. 나름 한문 공부도 많이 했고 펜글씨 연습도 계속했던 기억이 나요. 고사성어 등에도 관심이 많았고요. 하지만 농구선수로서 사랑도 많이 받았고 이후의 삶도 큰 풍파 없이 살아왔던지라 미련은 없어요. 한번씩 ‘내가 저런 꿈도 가지고 있었구나’싶은 정도죠.

    Q.자녀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있어요.
    저는 운동선수 출신치고는 많은 편이에요. 딸 둘에 아들 하나에요. 그때 기준으로 보면 빠른 것은 아니지만 은퇴하자마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요즘 선수들은 은퇴시기가 워낙 늦잖아요. 만약 시기가 맞아서 프로선수로 뛰었다면 현역 생활을 좀 더 이어갔을 듯도 싶지만 적당한 때 은퇴해서 늦지 않게 아이를 낳은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운동선수가 아닌 엄마로서의 삶을 돌아봤을 때는 더욱 그렇죠. 늦게 아이를 낳았더라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새끼들 중에 한둘은 못 볼수도 있었잖아요.(웃음) 이녀석들 중에 하나라도 못본다고 생각하면, 어후…, 상상이 안가죠.

    Q.어머님 피를 받아 운동하고 있는 자녀분들도 있을까요?
    지금은 살짝 후회해요. ‘농구를 하는 녀석이 한명 쯤 있었으면 좋았을텐데…’싶어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저희 때는 워낙 혹독하고 힘들게 농구를 했잖아요. 고된 훈련은 둘째치고 때리고 기합받고 그런 것이 일상이었어요. 심지어 실업무대에서도요. 여자선수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죠. 강희나 저나 늦게까지 있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 되서 미련 없이 은퇴했던 것에는 그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어요. 때문에 제 자식만큼은 농구를 시키고 싶지 않더라고요. 저는 그런 환경 속에서 운동을 했지만 자식이 그렇다면 참기 힘들 것 같았어요. 지금은 20살이 훌쩍 넘었는데 큰딸이 키가 174cm정도되요. 운동신경도 나쁘지않았고요. ‘운동은 힘든 것이다. 더 좋은 길이 많다’라고 이녀석이 어릴 때부터 반세뇌를 시키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은 모든 면에서 환경이 확 달라졌잖아요. 이렇게 바뀔줄 알았으면 농구 선수로서의 길에 도전 정도는 해봐도 나쁘지 않았을 듯 싶더라고요. 어쨌든 큰딸은 대학교를 졸업했고 작은 딸은 재학중이에요. 이제는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운 전공대로 가는게 제일 좋겠죠.

    Q.아, 그럼 한명도 없는 것인가요?
    아뇨. 막둥이 아들이 영동중학교 2학년인데 운동은 하고 있어요. 아쉽게도 농구가 아니라 야구네요.(웃음) 농구를 시키고 싶었는데 본인이 야구를 원해서 그길로 가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쭉 키워보다가 느낀 것인데 ‘보는 교육’의 중요성이 참 크더라고요. 부모가 백날 말로 뭐라고 뭐라고 하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뭔가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게 효과가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 농구하던 시절 아들 녀석을 데리고 다녔어요. 아니라 다를까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곧잘 하더라고요. 단순히 ‘운동하는 자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재능이 상당했어요. 빠르기도하고 체력이 너무 좋은거에요. 좀처럼 몸을 써도 지칠줄을 몰라요. 어릴때는 축구를 좀 시켜봤는데 그 과정에서 성향이 나오더라고요. 몸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 점에서 축구는 맞지 않았죠. 하지만 농구는 몸싸움을 하지만 축구처럼은 치열하지 않거든요. 포지션에 따라 몸싸움의 강도도 차이가 나고요. 그래서 농구로 바꿔서 가르쳐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취미반으로 야구를 시작하더니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시켜달라는거에요.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때에요.

    Q.바로 포기하시고 야구를 시키신 것인가요?
    그게 안되더라고요. 역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어, 이게 아닌데…’ 농구를 시켜보고 싶은 마음에 용돈도 줘가면서 다양한 회유책을 썼지만 안 통했어요. 그날 이후로 더 농구장도 열심히 데리고 다녀봤지만 농구는 관심없고 심지어 반코트에서 혼자 도루연습을 하고 있는 것까지 봤어요. 히유… 그 정도까지 하면 엄마는 항복해야죠.(웃음) 그렇게 야구가 좋다는데 그쪽으로 밀어줘야지 어쩔 수 있겠어요. 발도 빠르고 센스도 있는 편인지라 이종범같은 훌륭한 1번타자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은 있지만 최근에는 몸도 커지고 살도 좀 쪄서 그런지 기동력이 떨어졌더라고요. 아직은 시작단계라 체형과 성향에 맞게 가다보면 본인에게 맞는 옷을 입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아들이 행복한게 우선이잖아요. 지금은 즐겁게 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포인트가드 포지션으로 상대 주전 센터까지 수비했습니다”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초등학교 4학년 2학기쯤 학교에 농구부가 만들어졌어요. 있는 자원 내에서 수급을 해야하기 때문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모집을 했죠. 당시 저는 농구가 뭔지도 모를 때지만 운동 자체는 좋아했어요. 운동회 때 달리기나 계주 등을 하면 나가서 곧잘 뛰고 그랬거든요. 선생님께서도 제가 달리기가 빠르다는 것을 아셨나 봐요. 왜냐면 그때도 키는 작았으니까요. 그냥 방과 후에 끝나고 노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농구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부모님께는 바로 말씀을 못드렸어요. 몸이 좀 약한 편이라 허락을 하지 않으실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한달 정도 지나니까 부모님께서도 눈치를 채셨지만 다행히 제가 워낙 즐겁게 하니까 큰 반대는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해서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Q.처음에 포지션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무래도 키가 작다 보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당연스럽게 가드를 했고 쭉 그 포지션에서 뛰었어요. 저는 농구를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신장의 이점은 거의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냥 사이즈가 이러니까 거기에 맞는 플레이를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죠. 오히려 해당 포지션의 익숙함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Q.당시는 포인트가드에 대한 개념이 잘 안 잡혀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정통 포인트가드의 기량을 닦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게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렇네요. 오히려 포지션별 구분화는 지금이 훨씬 잘 되어있죠. 당시는 포지션을 그렇게 따지지 않았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플레이했고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니 정통 포인트가드였구나 싶어요. 농구를 시작하던 시점부터 리딩하고 패스주고 그냥 포인트가드처럼 플레이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퓨어가드라고 불리는 1번이 엄청 희귀해졌죠. 대부분이 듀얼가드고요. 여기에는 선수들의 성향도 있지만 시대의 기조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개인기로 많이 밀어붙이는 경향이 많은데 당시에는 철저히 팀플레이를 강조했거든요. 저희 국민은행이 특히 그랬죠. 개인기가 좋은 선수들도 팀플레이에 맞춰가면서 움직였던지라 저 역시 더 빛날 수 있었지 않나 싶어요.

    Q.콤비로 뛰었던 이강희 선수도 마찬가지였다고 들었는데, 신장은 작지만 수비는 결코 약하지않았다고 들었어요.
    모르겠어요. 수비는 기록지표로 딱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부분도 많을 것 같아요. 열심히 하기는 했어요. 수비에서 구멍이다는 소리는 듣기 싫었으니까요. 당연한 상식이겠지만 신장이 작으면 수비시 불리한 점이 너무 많아요. 농구에서 사이즈가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사실은 수비 때문이거든요. 공격이야 키 작아도 슛 좋고 패싱센스 좋으면 잘 풀어가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수비에서는 자신보다 크고 힘 좋은 선수와 붙으면 할 수 있는게 확 줄어들거든요. 그래서 수비시에도 정말 이를 악물고 했어요. 저와 같은 가드 포지션은 물론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등에서는 정은순 선수를 전담수비 하기도 했으니까요.

    Q.네? 제가 잘못들은 것 아니죠? 삼성의 그 레전드 센터 정은순 선수 맞나요? 그 선수는 신장(185cm)은 물론 사이즈 자체도 듬직한 정통 빅맨이었잖아요.
    그렇죠. (정)은순이는 단순히 키만 큰 센터가 아닌 파워까지도 남달랐죠. 자신보다 큰 선수들까지 포스트업으로 박살 냈을 정도니까요. 거기에 BQ까지 좋아서 국제대회에서도 서양선수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 매치업이 되던 선수였어요. 하지만 평균신장이 작은 저희팀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어요. (조)문주 언니같은 경우는 (성)정아 언니가 있었으니까요. 당시 삼성 더블포스트가 워낙 강력했잖아요. 매치업은 됐지만 사실 미스매치적인 성격도 있었죠. 하지만 키 큰 선수의 약점인 높은 드리블을 파고들고 하체 중심으로 수비하는 등 껄끄럽게 하려고 많이 애썼던 기억이 나요. 어차피 골밑에서 제대로 자세 잡히면 방법이 없잖아요. 그전까지 힘들게 하는 거죠. 지금 생각해봐도 어찌 그럴 수가 있었나 싶어요.(웃음) 

    Q.왠지 당시 국민은행의 팀컬러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뛰던 당시는 서서히 금융권 팀의 힘이 떨어져 가던 시기에요. 현대, 삼성, 선경(SK) 등이 제대로 힘을 쓰면서 세력구도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죠. 아무래도 금전적인 면이나 그로인한 선수수급 등에서 금융권팀이 불리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문주언니까지 은퇴하면서 저희팀의 신장은 더욱 낮아졌어요. 저나 강희나 둘다 사이즈에서는 별로 경쟁력이 없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깡으로 대항한 끝에 중간중간 우승도 차지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문주언니 은퇴하고 우승할 때 멤버중 180cm넘는 선수는 한현 선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나요.
     

    Q.사이즈가 작아도 얼마든지 농구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네요.

    농구에서 사이즈는 정말 중요하죠. 특히 저같이 작았던 선수들은 어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농구도 팀 스포츠잖아요. 작으면 작은 데로 자신들만의 장점이 있고 그것을 잘 살려서 근성있게 하면 충분히 경쟁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시 국민은행 멤버들은 사이즈는 작았지만 큰 경기에서 신장이 좋은 팀과 붙어도 결국 위축되거나 겁먹지 않았거든요. 기세와 흐름을 타서 이기기도 했고 지더라도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어요. 그러한 경험과 전적이 쌓이다 보니 상대팀도 저희를 어려워했고요. 그래서인지 지금 젊은 선수들을 보면 아쉬움도 있어요. 분명 당시보다 체격 조건도 좋고 환경도 월등한 편이지만 투지, 근성 그런 부분을 더 끌어올리면 어떨까 싶거든요.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저희 때도 그랬지만 기존 세대가 현 세대에게 잘못 충고를 하게되면 잔소리같이 들리기도 하더라고요. 그냥 예전에 치열하게 농구 했던 언니들은 이렇게도 생각하고 있구나 정도로 받아주세요. 다양한 전술이나 그런 면에서 지금 세대가 더 뛰어난 부분도 많을거에요.

    Q.그런 국민은행의 팀컬러가 기업 이미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당시 국민은행 신입사원 면접을 보면 농구 때문에 국민은행을 지원하게 됐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농구팀이 근성과 투지를 보이고 좋은 성적까지 거두니까 국민은행이라는 기업 자체도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졌던 것이죠. 당시 여자농구를 응원했던 팬들께서는 지금까지도 그때를 잊지 않는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뭐랄까. 찐팬이 많았던 것 같아요.

    Q.농구에 대한 열정이 참 넘쳤던 시대같아요. 프로화가 조금만 더 빨리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을 듯 싶어요.
    맞아요.(웃음) 당시 선수들과 만나면 하나같이 그런 얘기들을 해요. 저희 때 프로가 만들어졌으면 선수 생활도 더 오래가져 갔을 것 같다고. 프로가 되면서 환경적인 요인은 물론 연봉 등 선수들에 대한 대우도 완전히 달라졌잖아요. 그래서 저희끼리는 ‘한 5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참 좋았을텐데…’하는 농담반 진담반 얘기도 종종 나누죠. 꼭 돈뿐만 아니라 시스템적인 부분의 차이도 커요. 저희 때는 뼈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은 어떻게든 경기를 뛰었거든요. 대포주사라고 하죠. 경기에 나서면 안되는 부상을 입고도 그런 것 맞고 이 악물고 코트에 나섰어요. 지금은 손가락만 살짝 다쳐도 2~3주 쉬면서 충분히 회복을 하고 나오잖아요. 이런 부분만 봐도 선수 수명에서 차이가 클 수밖에 없죠.

    “혼나지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했습니다”

    Q.학창시절, 우와 저 선수는 정말 잘한다고 느낀 동기 혹은 선후배가 있었을까요?
    롤모델이 한분 계셨어요. 제가 농구를 배워나가고 선수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정말 큰 영향을 끼친 분이죠. 지금 그 언니랑 함께 WKBL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마 그 언니에게는 한번도 이런 얘기를 안해서 이 기사를 보시면 ‘잉? 내가? 정말’ 막 이러실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초등학교때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가 늦은 시간에도 꼭 중계를 보게 하셨어요. 자고 있는 저를 깨워서 ‘저 경기는 꼭 봐야 된다’며 초코파이랑 우유까지 준비해주셨습니다. 중국 아니 당시에는 중공이라고 했죠. 위성생중계이기는 했지만 시차 때문에 밤 11시 넘어서도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 당시 국가대표팀에서 포인트가드로 활약했던 박양계 언니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아무래도 저와 포지션이 같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봤던 것 같은데 ‘아, 저 때는 저렇게 하는거구나’, ‘우와! 저 플레이는 정말 대단하다’는 등 살아있는 교과서 역할도 됐어요.

    Q.선수 박현숙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도자로는 누가 있을까요?
    저는 초중고까지는 순둥순둥 무난하게 농구를 해왔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국민은행에 입단했는데 그때 팀을 맡고 계신 분이 김태환 감독님이셨어요. 감독님을 뵙고 접해보니까 너무 무서운 거에요. 제가 은근히 겁도 많고 그런 구석이 있거든요. 그냥 ‘최대한 안 맞고 선수 생활을 하고싶다’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농구를 잘하고 못하고는 두 번째 문제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안 맞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어요. 지금이야 때리고 기합주고 하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만연했잖아요. 그때가 좋다 나쁘다는 둘째 문제고 일단 분위기가 그랬어요. 선후배 관계도 엄격했고 감독님도 무서웠고요. 신입시절 저는 그냥 주눅이 팍 들었어요. 그저 덜 맞고 덜 혼나고 그렇게 지내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결국 방법은 농구를 잘하는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에 도달했죠. 정말 열심히 했고 그때부터 기량이 본격적으로 늘어갔던 것 같아요.(웃음) 

    Q.주눅이 들면 더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긍정적으로 풀리셨네요.

    그러게요. 저는 이상하게 잘 풀린 케이스죠.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나름대로 승부욕도 강했던 듯 싶어요. 다만 혼나기 싫은 것이 1번이었을 뿐이죠. 어쨌거나 혼나고 싶지 않아서 훈련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스스로도 훈련을 참 많이 했다고 느꼈던게, 쉬는날 있잖아요. 저는 쉬는 날이 정말 싫었어요. 하루 이틀 쉬고 훈련을 하면 배로 힘들더라고요. 안되겠다 싶었어요. 저는 집이 대전이라 휴일에도 숙소 생활을 했거든요. 어차피 특별히 할 것도 없고 괜히 쉬고 나면 훈련 때 더 힘들기만 하니까 휴일에도 개인 연습을 열심히 했어요. 기량 향상?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훈련때 덜 힘들고 싶어서였죠. 동료 언니가 ‘쟤는 먹이기만 하면 뛰는 얘야’라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어쨌거나 동기는 조금 이상하지만 그렇게해서 기량은 늘어가게 됐죠.

    Q.김태환 감독이 밉거나 그러지는 않으셨나요?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요.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웃으면서 말할 수 있어요. 은퇴하던 당시에는 그야말로 치를 떨었죠. 기자님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을걸요. 그나마 저나 강희는 눈치 빠르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덜 혼난 편이에요. 많이 혼나는 동료들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불쌍할 정도였어요. 저도 운이 좋았던게 먼저 1번을 봤던 언니가 저 입단하고 3년만에 은퇴를 해서 주전 자리를 비교적 빨리 찼어요. 혼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죽어라 하니까 그나마 덜 혼나면서 선수 생활을 했죠. 그것도 상대적인 부분일 뿐이겠지만요. 저희끼리 농담삼아 하는 말이지만 ‘감독님 지금 같았으면 수갑을 찼어도 100번은 찼을 것이다’고 말하고는해요.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성적이라도 나왔으니까 별 이슈가 안된거죠. 다들 참 힘든 시절이었어요. 감독님이 특별히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지도 방식이 그랬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세월이 흐르니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요. 하지만 다시 태어나서 농구를 한다면 좀 안 무서운 환경에서 농구하고 싶어요.(웃음)

    Q.당시 국민은행의 최고 무기는 박현숙, 이강희의 가드라인이었죠. 동료로서 이강희는 어떤 선수였나요?
    저는 참 의아했던 것이 강희랑 제가 사이가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에요. 예전에도 그랬고 저는 강희랑 쭉 친했거든요.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저와 강희는 친해요’ 항상 그렇게 대답했어요. 사실이니까요. 언젠가는 강희랑 함께 대표팀에 갔는데 선배 언니가 저를 불러서 ‘너 진짜 강희랑 친해?’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진짜 이해가 안됐어요. 왜들 그러는지. 나중에 보니까 팀에서 주전급으로 뛰는 동기생들은 사이가 안좋은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그런줄 알았나봐요. 하지만 저희는 친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국민은행 분위기가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어요. 감독님도 무섭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언니들도 어렵고…, 의지할 것은 친구밖에 없었어요. 중간에 누가 먼저 은퇴한 것도 아니고 쭈욱 함께 손발을 맞춰나가면서 선수 생활을 같이 했잖아요. 저는 영혼의 콤비였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서로 호흡도 잘 맞았어요. 속공 때 제가 다소 공을 멀리줬다 싶은 순간에도 강희는 그걸 잘 받아서 마무리해줬어요. 평소에도 공을 줘야 할 순간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강희였고요. 볼없는 움직임이 엄청 좋은 친구였죠. 저는 강희가 적재적소에서 잘 움직여줘서 고맙고, 강희는 입맛에 맞는 패스가 잘 들어와 줘서 고맙고…, 거기에 대해서 따로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서로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Q.둘다 신장은 작았지만 수비가 좋았어요.

    그러기는 했죠. 공격 스타일 못지않게 수비 색깔도 저희는 서로 좀 달랐어요. 강희는 많이 뛰어다니고 그러기보다는 손질이 좋아서 뺏는 수비를 많이 했어요. 거기에 체격도 좀 있어서 몸싸움, 버티는 수비에도 능했고요. 반면 저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밀착마크하는 수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큰 선수들의 전담수비수로도 활용되었던 듯 싶기도 해요. 공격뿐 아니라 수비에서도 상호보완적인 관계였죠.

    Q.당시 좋은 1번들이 많았는데 대표팀에 가면 그중에서도 리딩은 박현숙의 차지였어요.
    그때 좋은 가드 자원이 정말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잘하는 선수 위주로 대표팀을 구성하다 보면 주전급 가드만 여럿 있는 거에요. 금메달을 땄던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가 특히 그랬어요. 잘하는 선수가 가드에 집중되다 보니 가드 넷에 센터로는 은순이 하나 붙어서 그렇게 뛴 적도 있었어요. 제가 특별히 잘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그중에서는 가장 정통 1번에 가까웠으니까 리딩을 맡았던 것 같아요. (전)주원이는 득점원으로서도 능력이 특출났고 (천)은숙이 역시 전천후 스타일이었으니까요. 제가 좋은 선수들 덕을 많이본거죠. 그렇게 센스있고 능력있는 선수들과 뛰면 1번 입장에서도 엄청 편하거든요.

    “포인트가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야되는 포지션같아요”

    Q.포인트가드로서 이른바 ‘패’가 많았습니다. 단순히 패스만 잘하는 것이 아닌 돌파, 슈팅력 등 꺼낼 수 있는 카드가 다양해서 수비하기 매우 까다로운 선수로 평가받았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발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기동력에 장점이 있어서 속공플레이를 즐겨했어요. 당시 감독님도 빠른 공격을 강조하셨고요. 그런 과정에서 쉴새없이 치고 나가는 플레이에 능숙해졌는데 언제부터인가 상대 수비진의 빈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거에요. 그러다 보니 가속을 올려서 그대로 돌파를 할까 아니면 외곽으로 킥아웃 패스를 나갈까, 빈틈을 노려서 건너편 동료에게 어시스트를 뿌릴까, 아님 살짝 리듬을 죽여준 다음 멈춰서서 미들슛을 쏠까 등 다양한 선택지가 마구 쏟아지더라고요. 포인트가드로서 눈이 떠졌다고 할까요. 그런 것 같아요. 어쨌거나 그렇게되면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많이 힘들어지겠죠. 저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허를 찌르고요. 슈팅력같은 경우는 제가 슈터급으로 막 엄청 좋고 그런 케이스는 아니었어요. 본래 많이 던지지도 않았고요. 다만 중요한 순간에 던지는 슛이 종종 들어가서 임팩트 효과로 인해 슛이 좋다는 이미지가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 생각났는데, 삼성하고 결승시리즈를 치렀을 때 저희가 끌려가다가 제가 버저비터를 성공시켜서 연장전을 간 적도 있어요. 연장가서 결국 이겼던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이른바 빅샷을 좀 넣었던 기억이 나요.

    Q.넓은 시야는 본래 타고 나신 것인가요? 경기를 하다보면 수비 등을 의식하느라 주변을 넓게 보기가 어렵잖아요.
    그렇죠. 눈으로 보는 시야에는 한계가 있어요. 움직이면서 다 둘러보기도 쉽지 않거니와 경기 내내 어떻게 그러고 있어요. 급박한 상황도 많고 바로 앞이나 옆에는 상대팀 수비수가 호시탐탐 저를 노리고 있는데요. 그걸 다 체크하는 시력과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대단한거겠죠.(웃음) 포인트가드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저는 공격 상황에서 주로 상대팀의 수비를 봐요. 예를 들어 제가 우리팀 센터에게 공을 주려고 했는데 그쪽으로 도움수비가 들어와요. 그러면 수비가 들어온 쪽이 빈거잖아요. 그렇게 체크를 하는 것이죠. 구태여 여기저기 다 보지 않아도 수비의 움직임을 살피면 어느 쪽으로 구멍이 생겼는지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그려져요.

    Q.빈틈을 읽고 거기에 맞게 패스가 나가는 것이군요?
    그렇죠. 더불어 저같은 경우는 늘 적어도 2번째 패스까지는 생각을 하면서 플레이했어요. 저희 팀도 마찬가지겠지만 상대팀 역시 경기 전에 수비 전술을 짜가지고 올 것 아니에요. 특히 포인트가드같은 경우는 확실하게 묶어둘 필요가 있죠. 1번을 막아낸다는 것은 단순히 한선수를 봉쇄하는게 아닌 상대팀 전체의 움직임과 볼 흐름을 빡빡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상대 팀에서는 저에 대해서 분석이 많이 들어갈 것이단 말이에요. 이 상황에서는 주로 이런 패스를 즐겨하고 저 상황이 오면 이렇게 패스하고 더불어 돌파는 왼쪽 위주로 등 수비하는 선수들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수비프로그램이 들어가 있겠죠. 저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즐겨하는 플레이에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패턴이나 리듬을 다르게 해버리죠. 찰나의 순간에 판단해야 되는 것인데…, 다른 포인트가드들은 어찌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했어요. 나름대로 경험이 쌓이면서 깨우친 노하우라고 할 수 있죠.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궤적을 읽히거나 거기에 상대가 적응하게 되면 위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Q.패스 타이밍 같은 것은 어떻게 잡으셨나요?

    포인트가드의 패스라는 것은 감각적인 부분과 무수한 경험이 섞여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가드는 경기는 물론 그 이전에 수없이 행하는 훈련 등을 통해 수백 수천번 동료들과 패스 호흡을 맞춰보게되거든요. 동료 각자의 성향이나 플레이 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지라 거기에 맞게 패스가 들어가는 것이죠. 속공 상황에서 어떤 동료가 뛰고 있는데 발이 굉장히 빨라요. 그러면 좀 빠르고 길게 앞쪽으로 던져줘도 되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그 선수가 충분히 잡아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반면 볼 캐치가 조금 떨어지고 발이 느린 선수에게는 한템포를 죽여서라도 안정적으로 볼을 주는 쪽이 좋죠. 어쨌거나 농구는 팀플레이인지라 패스를 주는 쪽만 잘해서는 안되요. 받는 쪽도 잘 받아줘야죠. 그런 점에서 강희랑 서로 잘 맞았던 것 같아요.

    Q.다양한 속임동작에 더해 아이페이크도 자주 쓰셨는데요. 본능적으로 막 나오던 것인가요?
    공격을 주로 하는 선수들은 본인이 마음먹은 데로 득점을 성공시킬 때 기분이 좋잖아요. 저는 제가 생각한 방식으로 패스가 제대로 들어가서 동료의 득점을 도울 때 희열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어떻게 상대 수비를 뚫고 패스를 줄까를 늘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 연관된 플레이들이 계속해서 발전된 듯 싶어요. 아무리 패스가 날카롭다 해도 상대가 눈치를 채면 막히는 것은 순식간이에요. 움직임을 속이든 타이밍을 속이든 어떻게든 속여야 패스 성공률이 높아지는 것이죠.

    Q.감독의 지시가 따로 없어도 본인이 알아서 리딩을 할 때도 많았을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작전이 많지도 않은 시대이기도 했지만 감독의 작전대로 공격이 풀려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 싶어요. 10개를 준비했다 해도 1~2개 성공할까 말까였죠. 경기는 선수가 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만큼 변수가 너무 많아요. 작전타임 불러서 감독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안되면 다시 이렇게 하고 등 5가지 패턴을 지시한다고 쳐요. 막상 다시 코트에 나오게 되면 대부분 5번까지도 안가요. 1번에서 막혀버려요. 작전대로 딱 성공하기가 그만큼 어렵죠. 평소에 패턴 연습을 많이 하고 훈련도 충실히 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상대 움직임이나 흐름에 맞춰 코트에서 뛰는 선수들이 알아서 능동적으로 풀어나가야 되니까요. 포인트가드를 맡고 있던 저같은 경우는 그런 책임이 더욱 많이 요구됐고요. 김태환 감독님같은 경우는 많이 맡겨주시는 편이었어요. 다만 맡겨줬는데 제대로 못한 경우에는 작전타임 때 포인트가드 잡는거죠.(웃음) 다른팀 같은 경우는 선배 우대 같은 것도 좀 있었던 듯 싶은데 저희 감독님은 그런 것이 일체 없었어요. 당시에는 살짝 서운하기도 했던 기억이 나요.

    Q.좀처럼 흥분하는 모습이 없었어요. 본래 차분하신 성격이세요?
    차분까지는 모르겠지만 흥분은 잘 안했던 것 같아요. 다만 경기시작 전에 긴장을 좀 하는 편이었는데 조금 뛰다보면 스르르 풀리더라고요. 득점 위주의 스타일이 아니여서였을까요. 저같은 경우 플레이의 기복은 적은 편이었어요. 뭘해도 안되는 날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확 잘하지도 확 못하지도 않고 늘 비슷하게 경기력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었던 듯 싶어요.

    Q.소속팀 혹은 대표팀 등에서 손발이 잘맞는 선수로는 누가 있었나요?
    소속팀에서는 아무래도 강희랑 잘 맞았고 대표팀가서도 (유)영주, (정)은순이 등 다들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제가 어딜가나 적응을 좀 잘하는 편이라서 그때도 장점이 발휘되지 않았나싶어요.(웃음) 대표팀이야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 다 모인 곳이니까 알아서들 잘한 것 같아요. 척하면 척으로 잘맞았어요.

    Q.정통 포인트가드로 대성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실까요?
    동료들 개개인의 습성에 대해 잘 알고 더불어 그날그날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빨리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듯 싶어요. 경기를 하다보면 꾸준히 잘하는 선수가 있고 그렇지않은 선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안되요. 선수들은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서 경기력에 편차가 생기는 경우도 많거든요. 특히 득점형 선수들이 그렇죠. 평소에 득점이 부진했던 선수라도 어느 날은 막 손끝이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포인트가드는 그것을 빨리 알아채야죠. 슛감이 좋은 선수에게 몰아줘서라도 그 순간을 써먹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또 그렇게 특정 선수의 활약이 펼쳐지다 보면 다른 쪽에도 오픈찬스가 생기고 팀이 전체적으로 분위기를 타게 되요. 그러면 자연스레 경기가 잘 풀리게 되는 거죠. 

    Q.운동 선수에게 부상은 정말 큰 적이잖아요. 선수 생활하시면서 부상은 없으셨을까요?
    다행히 자주 부상을 입은 편은 아니었어요. 대체적으로 큰 부상 없이 뛴 편인데 그래도 기억에 남는 부상은 있어요. 대구에서 있었던 플레이오프 경기서 어떤 선수와 충돌을 했는데 발목을 삐끗했어요. 늘상 그랬다시피 털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일어나지지가 않는거에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축을 받고 벤치로 돌아왔는데 발을 바닥에 댈 수도 없을 만큼 아팠어요. 결국 그날 경기를 못 뛰게 되었는데 김태환 감독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더라고요. 잡아야 될 경기를 못잡은 아쉬움이 크셨던거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까 인대가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고통스러워서 쉬고 싶었는데 감독님께서 대포주사라도 맞고 뛸 것을 요구했어요. 워낙 중요한 경기였으니까 감독님 욕심에 주전 1번이 무조건 필요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거에요. 그래서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엑스레이를 찍으니까 뼈에 금이 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기브스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전치 8주 정도가 나왔어요. 그때가 1월이었고, 3월 정도면 시즌이 끝나니까 사실상 시즌아웃이었죠. 다치고 싶어서 다친 것은 아니지만 입장이 참 난처했어요. 급한 마음에 약도 지어먹고 여기저기 용하다는 곳도 다녀보고했지만 뼈가 그렇게 쉽게 붙겠어요. 고통이야 이를 악물고 참는다고 하지만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는 것을 제가 어떻게 해요. 하지만 감독님은 저를 필요로 했고 결국 뼈가 붙지 않은 상태에서 한 경기인가 쉬고 다음 경기부터 다시 투입됐어요. 발목에 단단하게 테이핑을 하고 전반전을 뛴 다음 대기실에서 대포주사를 맡고 다시 후반전을 뛰었습니다. 아까 말했던 버저비터도 그때 나왔어요. 그런 식으로 경기를 이어나갔는데 결국 결승전에서 준우승에 그쳤고 그렇게 해당 시즌이 끝이 났죠. 이후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대표팀에서 저를 발탁했지만 그렇게 아픈 상태로 갈 수 있었겠어요. 그게 선수 생활하면서 제일 큰 부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궁금하기는 해요. 뼈가 제대로 잘 붙었는지. 은퇴할 때 엑스레이 찍었을 때는 뼈가 안 붙었었거든요. 이후 크게 아프지는 않았으니까 잘 붙었겠죠.(웃음) 큰 부상 입었던 다른 선수들은 비가 오면 어디가 쑤신다거나 막 그러던데 저는 그런 것은 없으니까 다행이고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박현숙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농구를 하면서 힘든 시절도 많았지만 정말 많은 사랑을 주셨던 팬분들이 있었기에 그 힘으로 버티고 보람도 느꼈지 않나 싶습니다. 그때도 감사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더더욱 감사함이 깊어지는 마음입니다. 팬분들의 소중함도 새삼 크게 다가오고요. 그 시절 농구를 사랑해주셨던 분들은 지금도 여전히 농구를 사랑해주고 계시겠죠? 팬분들이 계시기에 저희같은 농구인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농구 많이 사랑해주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기사 섹션 분류 가이드

1 글 보임 - 1 에서 1 까지 (총 1 중에서)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